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화의 댐 (문단 편집) === 건설 배경 === 이 댐이 지어지기 시작한 [[1986년]]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타오르던 때였다.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북한]]이 [[1988 서울 올림픽|서울 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금강산댐]][* 북한에서는 임남댐이라고 부른다. 이 댐 때문에 [[금강산선]]의 일부 구간이 수몰되어 버렸다.]을 건설해 무려 '''200억 톤의 수공을 펼쳐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든다'''고 과장되게 발표했다. 건설부 장관이 10월 30일 처음으로 발표했는데 그날은 [[10.28 건국대학교 항쟁|건국대학교에서 발생한 점거농성]]이 진압되기 전날이었다. [[파일:금강산댐 수공.jpg]]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하루 종일 [[63빌딩]]이 절반이나 물에 잠기는 것을 비롯해서 [[서울특별시]]의 주요 건축물이 물에 잠기는 모형을 보여주었고[* 평화의 댐이 있으면 수공을 막을 수 있고 보조댐까지 지으면 역공격도 가능하다는 쇼도 했다.] 유명한 대학 교수들[* 대표적으로 서울대 토목공학과의 교수였던 [[선우중호]]는 [[전두환]]의 구미에 맞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학문적으로 전두환의 사기질을 도왔으나 사기극이 드러난 후에도 별다른 타격 없이 지내다가 1995년에는 서울대 총장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딸을 고액과외 시킨 것이 드러나 자진사퇴했다. 이후 명지대 총장을 지냈고 광주과학기술원의 총장으로 있었다가 2012년 퇴임하였다. 여담이지만 이 양반이 명지대 총장을 지내던 시절에는 [[국가정보원]]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여 두고두고 명지대의 흑역사로 남았다.]이 출연하여 그럴싸한 설명까지 덧붙이는 바람에 국민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해 기업과 국민들에게서 성금을 거의 반강제로 모금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국민학생들도 저금통이나 용돈을 털어 평화의 댐 건설에 보태는 일까지 벌어졌다.[* [[국민학교]]에 찾아와서 전교생에게 빈 봉투를 나눠주고 모금함에 집어넣는 장면을 찍어서 TV에서 방송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대부분의 국민학교에서는 교사 주도로 성금을 내지 않는 학생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따돌림을 유도하는 일까지 있었다. 또 절대 열외는 존재하지 않아서 최저생계비를 받고 사는 학생에게도 100~500원을 요구했다. 1980년대에 국민학생에게 500원이라면 상당히 큰 돈이었다. 그때는 10원짜리 풍선껌이나 90원짜리 라면도 있었고 성인 시내버스 요금이 100원이었다.]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이나 해외에 살던 교포들한테까지도 성금을 걷었다. 심지어 TV 쇼 프로그램까지 동원하여 홍보에 앞장서기도 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YFK8qO76d544|링크]]([[대한뉴스]]) 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반공]] 분위기로 얼어붙는 바람에 줄기차게 개헌을 요구하던 야당과 국민의 여론,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는 크게 위축되었다. [[전두환]]이 이것을 노렸다는 것이 정설인데 전두환의 심복이었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과 제2차장 [[이학봉]]이 주도하여 '시나리오'를 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대표적인 실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외에 [[이기백(군인)|이기백]] 국방부장관도 이 일과 관련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배재정]] 의원이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을 강하게 비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